두려움이 눈물로 변한 나의 북녘 방문

* 이 글은 개성 연탄나눔에 참여한 포천나눔의집 신현애(마리아) 님이 작성한 글입니다.

는 포천나눔의집에서 천하장사 신장군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힘든 일 마다하지 않고 거뜬히 해내는 모습 탓인지 제게 주어진 별명이지요. 이런 제가 드디어 북녘 땅을 밟고 돌아왔습니다. 북쪽 땅 밟고 싶은 남쪽 땅 천하장사 신장군이 지난 11월 28일 드디어 북쪽 땅을 밟고 온 남쪽 땅 천하장사 신장군이 된 것입니다. 제가 생활하고 있는 포천나눔의집에서 연탄기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연탄 5만장을 구입하여 그 연탄을 싣고, 직접 개성에 가서 북녘 주민들에게 전해줄 기회가 생겼다는 공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나눔의집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인원은 세 명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포천나눔의집 사무국에서는 연탄나눔운동에 참여할 사람을 정하기 위해 신청을 받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제비뽑기로 결정을 하기로 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추첨을 하셨고, 저는 마지막 세 번째 행운아가 되었습니다. 제가 뽑히는 순간 얼마나 기뻤던지 뽑히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천나눔의집에서는 실무자들은 물론이고 주변 분들에게 연탄나눔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알려나갔습니다. 그런 홍보 속에서 저는 제 주변 분들이 나타내시는 두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흔쾌히 동참하시는 분. 그리고 ‘남쪽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북쪽을 도와줘야 하느냐?', '연탄이 어려운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다른 용도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등. 이런 반응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쪽에도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고, 연탄이 어떻게 쓰일지는 저도 직접 보지 못하니 확인할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북녘 땅에서 연탄을 필요로 하시는 분들에게 그 연탄이 소중하게 쓰이길 바라며 저의 마음을 비롯하여 연탄기금을 내주신 분들과 그 외에 많은 분들의 마음이 그곳에서 따뜻하게 불타오르길 기대할 뿐이었습니다. 더더욱 우려되었던 부분은 남과 북의 관계가 좋지 않아 개성공단에서 일하시는 많은 분들이 더 이상 북쪽에 있을 수 없고, 민간차원의 지원도 우리가 마지막이라는 상황이었습니다. 주위에서 걱정해주시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저는 태연하게 북녘 땅을 밟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는 야근을 하며 11월 28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을 깨우며 나눔의집 가족들과 집결지인 서울 광화문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를 북쪽으로 안내할 버스 안에서도 북쪽 땅으로 간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라산역에 위치한 남측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하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기자 분들도 많이 와서 취재를 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연출되었습니다. 예정시간 오전 09:30보다 늦게 수속을 밟고 북쪽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여 펄럭이는 태극기를 뒤로하며 개성 북측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도 수속을 마치고, 예상보다 긴 기다림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낯선 북한 군인들을 접하고 나니, 이제 내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고 그제야 내가 북녘에 왔음을 실감했습니다.
소 늦게 우리의 차령은 연탄 5만장과 개성 봉동마을로 향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북한 마을은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이것이 제 첫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활기찬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유로 남쪽 사회의 70년대 모습을 실감하지는 않지만 같이 동행하는 나이 드신 분들의 말씀대로 70년대 남쪽의 생활모습(건물, 사람들의 옷차림 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북쪽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연탄차량도 길게 늘어서고, 앞치마와 토시, 장갑을 끼고 만반의 준비를 한 우리들은 북한 주민들과 뒤섞여 차량에 있던 까만 연탄들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땀이 나고, 얼굴이 검게 변하도록 열심히 연탄을 떼어내고, 옮기고, 전하고, 정리하며 우리의 사랑과 정성을 담아냈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커피도 나눠 마시고, 준비해간 떡도 나누었습니다. 제가 북한 주민들께 떡을 떼어 입에 넣어드리자 얼마나 어색해하시고, 부끄러워하시는지... 더러 일이 다 끝나면 사람들과 함께 먹겠다고 마다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5만장의 연탄을 가뿐히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수고의 인사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뭔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마음이 짠함도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정말 짧은 시간을 북한 주민들과 보냈습니다. 연탄을 모두 하역한 뒤 우리 일행은 개성공단과 봉동마을 경계에 위치한 봉동관에서 맛있는 북한 음식을 먹으며 공연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개성공단도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연일 지속되는 개성관광 및 공단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 때문인지 사뭇 긴장된 모습이었습니다.

시 남쪽 땅에 내려오면서 저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이렇구나 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이산가족인 외가댁도 떠올랐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등 여러 생각들과 느낌들로 북받쳐 있던 가슴의 응어리들이 조각조각 터져 나왔습니다. 누구나 북녘 땅을 처음 밟아보면 눈물을 흘린다는 말씀에 마음 한 구석을 북녘 땅에 묻어 두고 와야 했습니다.

번 북녘 땅 방문을 통해 깨달은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은 그곳에도 계신다는 강한 확신이었습니다. 북녘 땅 꼬마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은 조그마한 손등과 추위에 붉게 달아오른 볼 위에도, 누런 소에 달구지를 매달아 끌고 가는 농민 옆에도, 떡을 나눠 먹으며 쑥스러워 하는 북녘 아저씨의 미소 위에도, 그리고 신기한 듯 서로(남ㆍ북쪽 사람들)를 바라보는 차창 사이에도 하느님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하느님은 제 마음에 살아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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